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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온 천년, 이어 갈 천년 ‘2019 강릉단오제’ 6월3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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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강릉단오제 포스터 민속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찾기 힘들다. 때문에 옛 문헌의 작은 단서에 접근하여 유추 해석하기도 한다.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우리 민족의 제천의례가 강릉단오제의 기원이다. 삼국시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5월 단옷날 시조신(始祖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와 5묘(廟)를 정하여 한 해에 여섯 번씩 제사하였고, 가야에서는 시조인 수로왕에게 매년 다섯 번씩 제사를 지냈다. 그 중 한번씩이 단옷날이었다. 신라와 가야의 관습에 미루어 백제와 고구려의 풍속도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후삼국 태봉의 왕이었던 궁예가 단옷날 태어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단오 풍속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신라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단오를 수릿날로 기록하고 있다. 「동동」은 단옷날을 맞아 천년을 장수할 약을 바치겠다는 의미이다. 수릿날을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절기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조상에게 제사하고 단오시(端午詩)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이고 불꽃놀이와 서민들의 돌싸움을 지켜볼 만큼 각별한 날이었다. 이 같은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성행하였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한때 단오놀이를 금지시켰으나 세종은 석전을 부활시켜 병중인 상왕 태종과 함께 서민들의 돌싸움을 구경하였다. 단옷날은 사형집행을 금지시켰고 경국대전 형전에 금형일로 등재되어 있다. 왕에 따라 달랐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 단오를 삼명일로 정해 공휴일이었던 경우도 많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급격한 근대화는 전통문화를 낡은 것, 버릴 것으로 치부했다. 수많은 전통들이 사라져가고 단오 역시 많은 지역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노인들은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중에도 단오제를 시행했노라고 힘주어 고증한다. 무녀들도 시기적으로 어려울 때는 압박의 눈을 피해 중앙시장이나 남대천 변, 성남동 한구석에서 소규모로